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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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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 지명유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1-30
온후하고 순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해서 유래

< 화순역사의 개요 >
한민족의 요람지는 요하이동의 남북만주의 넓은 벌판으로서 송화강 일대를 중심으로한 지역에 걸쳐 있었고 서기 699년부터 926년까지 만주 동부 연해주인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존속한 발해는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합심하여 창건한 나라이지만 조선왕조 건국이래 압록 두만의 양강을 경계로 하여 국토가 한반도 안으로 굳혀지자 지방행정구역이 팔도로 정립되었는데 1896( 고종 33)년에 이르러 13도로 나누어지게 되면서 노령이남을 전라남도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지세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한라산에서 종지부를 찍었는데 산세는 줄곧 남하하여 내려오다가 서남쪽으로 지긋이 휘어지면서 유무인도 대소천여개의 도서를 조약돌처럼 뿌려놓아 다도해를 조성해 놓았다.
전라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화순군은 삼한시대 마한의 판도아래 54국중의 여래비리와 벽비리 였다. 여래비리는 화순 능주 지역의 부족사회를 형성하였고 벽비리는 동복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한은 경기(한강이남) 충청, 전라 등 3도에 걸쳐 있었고 총 54국을 거느렸다고 하지만 그 나라는 군현정도의 크기였으며 부족연맹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한시대의 문화는 우리나라 고고학상 청동기문화와 고분기(삼국시대) 사이의 문화를 말하며 실년대로는 청동기후기(초기철기) 에서 철기시대(철기 2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삼국시대가 문헌상으로는 서역기원전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사실상 고대국가로서의 성립은 서기4세기초인데 삼한시대는 그 전단계에 속하고 있다.
이 시기의 문화적 내용에 있어서는 청동기 지석묘가 소멸되어가는 반면 철생산이 성행 도작의 발전등으로 특징지어지고 철제 농구와 토구로 생산력의 급증과 농경술의 발전으로인구의 증가 주거지의 확대 교역의 발달이 촉진 되었다.
마한시대의 전기유물이 출토된 것은 남면 절산리에서 세형동검편과 도곡면 대곡리에서 세형동검 3점, 팔두령 2점, 동경2점, 쌍두령 2점, 동부 1점, 동시 1점 등이 출토되어 마한소국인 벽비리와 여래비리로 성립시킬 수 있었던 그 세력을 엿볼수 있다.
마한 54국의 하나였던 백제의 팽창주의 침공을 받고 마한이 패망하여 백제시대가 되자 화순지역은 잉리아현이었고 능주지역은 이능부리 죽수부리 또는 인부리라 하였고 동복지역은 두부지현이라 하였다.
백제시대의 주요산업은 농업이다. 농업에 관한 기사는 33년( 다루왕 6)에 "남쪽 주군에 비로소 도전을 행하였다. "라는 기사는 남부지방의 주군에서 도재배를 알려주고 있다 .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전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도를 이종하기에 좋았으며 잠상에 밝아 겸포를 만들었다" 라 하여 오곡을 비롯하여 도의 재배가 성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서 화순지방에서도 농업이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35대 경덕왕이 백제시대 화순지역의 잉리아현을 여미 또는 여빈해빈으로 고쳤고 능주지역의 이능부리 또는 죽수부리를 능성군으로 고쳤고 동복지역의 두부지현을 동복현이라 고쳤다.
통일신라시대 전남지방의 지방조직의 실태를 보면 백제의 오방중의 하나인 남방의 구지하성이 있는 곳인 현재의 광주지방에 무진주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전국의 지명 명칭이 모두 한식으로 개명되었는데 이때 무진주가 무주로 바꾸고 무주를 주치소로 하고 15군 44현이 편성되었는데 능성군의 속현으로 여미현이 되었고 곡성군의 속현으로 동복현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화순지방 문화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양면 증리에 있는 쌍봉사에 철감선사탑과 철감선사탑비가 있는데 무르익은 기교로써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창조하여 통일된 미의 세계를 구현하는데 그 특색을 볼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초기 중앙정권의 오지인 동복현까지 파급되지 않아 지방의 호족이 자치적으로 압곡, 대곡, 보령,수촌, 구성현이라 하여 자치행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화순지역도 고려초기에 화순현으로 개명되었으나 화순현으로 개명되기전에는 오성, 산양, 서양현으로 자치행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능주지방은 능성현으로 개명되어 나주의 속현이었다가 1143년(인종 21)에 현령을 두었다. 동복은 고려초에 보성에 소속되었다가 고승 조담의 고향이라하여 중앙에서 감무를 파견하여 현으로 승격되었고 자치적 행정을 한 주변의 현들도 모두 동복현에 통합되었다.
고려시대의 화순지방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불교유적이다.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운주사의 석탑, 석불과 동복면 신율리에 있는 한산사지 삼층석탑과 이서면 보산리 보안사지 석탑편(광주박물관 정원이건) 이서면 영평리의 석불암 마애여래좌상 남면유마사의 해연대사탑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화순현은 1390년(고려공양왕2)에 감무를 두어 남평현을 겸임한 것을 1394년(태조 3)에 두 현으로 나누어 동복감무가 겸임하게 하다가 1405년(태종5)에 동복현을 폐하고 화순감무가 겸임하였다가 1418년(태종 18)에 각각 복구되어 화순현이 되었다.
화순현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시 왜군의 침입을 받아 참혹한 병화를 입어 민의로 폐현을 결정하고 능성현에 편입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에 복현되어 기념으로 식수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무성하게 화순군청앞 뜰에 자라고 있다. 이때의 화순현의 관할지는 읍내면, 서면, 동면의 3개면이었는데 1895년(고종 32) 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화순군이 되었다가 1908년 10월 15일에 군면통합에 따라 능주군이 되었고 화순이 편입되었다. 능주군은 1913년 화순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1914년 3월 1일에 동복군이 화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능성현은 고려초부터 조선조 16대 1632년( 인조 10) 까지는 능성현이었으나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의 성향이라하여 능주로 승격되어 목사가 부임하게 되자 이를 기념하여 죽수아문을 창건하고 토포사를 겸임하다가 1895년(고종 32) 에 능주군이 되어 주내 회덕 부춘 단양, 세청, 신풍, 오도, 대곡, 화남, 도장, 호암, 한천, 송석, 도림면을 관할하였다가 1908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화순군을 편입하였다. 동복현은 1407년( 태종 7) 에 화순현을 합하여 복순현이라 하다가 1416년( 태조 16) 에 동복현으로 복현되었고 1895년( 고종 32) 에 동복군이 되어 읍내, 내남, 외남, 외서, 외서, 내북, 외북의 7개면을 관장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화순군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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