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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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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지명유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1-30
ㅇ 최초의 지명(地名)
한강유역에 부여족(扶餘族)이 백제를 세운 것은 BC 18년의 일이다. 그러나 정작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8대 고이왕(古爾王)때 부터였고 우리고장이 속해 있는 마한(馬韓)의 중남부 지방까지 행정적으로 정리된 것은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때이다. 이때에 우리고장에 붙여진 이름이 무시이(武尸伊)이고 이것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최초의 지명인 셈이다.

본래 지명이란 지형이나 지세 등 자연조건에 다라 명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지방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주민의 정치적 세력에 의하여 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고장 최조의 지명이 무시이(武尸伊)는 통상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시이(武尸伊)라는 이 한자표기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읽기는 어떻게 읽는 것이 정확할까,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말고 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남의 글을 빌려쓴 이 무시이(武尸伊)라는 지명의 발음과 의미를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계(斯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音)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뜻(訓)으로도 쓴 흔적이 많다. 그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무시이(武尸伊)를 읽으면 "물"이라고 읽어야 한다. 당시 지명의 한자표기에서 이자(伊字)는 발음하지 않는 어조사(語助辭)로 하였고 시자는 리을로 쓴 흔적이 많으므로 무자(武字)를 소리나는 대로 발음할 경우 무시이(武尸伊)는 "물"이 되는데 이는 이 고장이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에도 부합된다. 과연 이 고장의 물의 고장이었다.

지금도 홍농(弘農), 법성(法聖), 백수(白岫), 염산(鹽山) 등은 등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군남(郡南), 군서(郡西), 대마(大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뿐 아니라 영광읍(靈光邑)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배들이 출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실증하는 좋은 예가 물무산의 존재이다. 수퇴산(水退山)이라도 하는 이산은 교촌리(校村里)의 남동방(南東方)에 위치한 山으로서 山名이 예시하듯이 물을 매어 놓은 곳 다시 말해서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끝지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 고장은 간탁(干拓)이 없던 옛날에는 흡사 물속에 들어앉은 듯한 지형을 하고 있었으니 선인들이 지명을 "물"이라고 하였음도 무리는 아니다. 시자(尸字)를 리을로 발음한(리을 받침으로 쓰인) 예(例)는 신라향가중(新羅鄕歌中)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가 있다. 예시하면 곡옥시(哭屋尸)는 "울" 환어시(還於尸)는 "돌", 회어시(廻於尸)도 "돌", 도시(道尸)는 "길", 숙시(宿尸)는 "잘"이라고 이독학(吏讀學)에서는 해독한다.

ㅇ 지명(地名) 녹기설(綠記說)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분석함에 있어서 확실한 문헌이나 고증할 만한 자료마저 미흡할 때에는 당해지역의 지명과 연관지어 풀어나가는 연구방법이다. 이제 우리도 마라난타(摩羅難陀)의 법성포 상륙을 고증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료가 없으니 이러한 학설에 의존하는 것이다.

첫째 상륙지점이라고 믿는 법성포(法聖浦)의 지명들이 장구한 시간적 간격이나 역사적 변화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하나같이 불록적(佛綠的) 색채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조창(漕倉)의 단원(單元)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법성포에는 고려(高麗) 성종(成宗) 11년(1992년)에 조창(漕倉)이 건치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부용포(芙蓉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고 여말(麗末)에 일시 문을 닫았던 조창(漕倉)을 복창(復倉)하면서 조선조(朝鮮朝)는 다시 법성포(法聖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는데 모두가 불연(佛緣) 깊은 이름들이다.

먼저 아무포(阿無浦)를 살펴보면 언제부터 불리운 지명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새로운 지명 부용포(芙蓉浦)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진 시대는 서기 992년의 일이다. 여하간 이 아무(阿無)라는 염불(念佛)의 의미는 귀명무량수불(歸命無量壽佛) 귀명무량광불(歸命無量光佛)이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돌아가 구원을 바란다는 말이다. 이 아무포(阿無浦)라는 지명이 서기 384년 난타존자(難陀尊者)의 도래를 기점으로 하였다면 그 이름은 장장 600년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다음 부용포(芙蓉浦)인데 이 지명은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조창(漕倉)을 건치하며서부터 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복창(復倉)이 되는 시기까지 400년간 불리운 이름으로서 이 역시 불교적 색채가 깊은 지명이다. 부용(芙蓉)이란 연화(蓮花)의 별칭으로서 연꽃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신성(神聖)과 순결(純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불상(佛像)은 연화좌(蓮花坐) 위에 봉안되며 불교의 모든 행사에는 의례 연화등(蓮花燈)이 등장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佛), 불(佛),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佛)은 부처요, 법(法)은 불경(佛經)이며, 승(僧)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對)하여 살펴보면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偈)(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ㅇ 옥당고을
조선의 성종 무렵부터 홍문관(弘文館)의 별칭(別稱)인 옥당(玉堂)을 상징하는 "옥당고을"의 칭호를 전라도 영광과 황해도 안악에서 사용해오고 있다. (영광을 南岳, 황해도 안악을 北岳) 그 연유는 고려때 芙容倉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28여 고을의 세곡을 관할한 法聖倉등, 지금의 법성항을 거쳐 중국과 국교가 있어 국내외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 하였으므로 일찍이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져 무역항(貿易港)으로 발달하여 "예악문물"이 찬연한 고을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의 지역이었다. 옥당골 원님의 임기가 만료되면 내직인(中央廳) 堂上官(정삼품)으로 영전하는 분이 많은 고장 이었기에 현재까지도 "옥당고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ㅇ 호불여 영광
1889년 29개면(557개리) 중 12,691호(44,783명)로 "호수(戶數)는 영광만한데가 없다"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이하응)이 말했다고 한다. 호수가 많은 고을수를 적다보니 나주(17,633호/57,782명), 순천(13,669호/46,338명) 다음에 영광이 세번째이고 전라도에서는 전주 다음으로 네 번째였다. 현대에 와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비교해 보면 과거 영광은 호수가 많고 인구가 많아 한마디로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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